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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출장안마”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도를 뜻하는 신라 계통의 고유어인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4]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이 원래 어떤 의미였을지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등에서 서라벌을 금성으로도 표기했다는 점과 구로구까지 포함하여 “설[새: 新, 金]-벌[땅: 羅, 城]”, 즉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견해가 있다.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서라벌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인된 바가 없으며, 그 발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 후 “셔ᄫᅳᆯ”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나서부터이다.
서울의 한자 음차 표기로는 이십일도회고시, 한경지략, 서초구출장안마증보문헌비고[5]의 서울(徐菀), 동사강목, 북학의의 서울(徐蔚), 대동지지의 서울(徐鬱), 앙엽기의 서올(徐兀) 등이 있다.[6] 이처럼 조선 시대에 서울은 용산구, 마포구(漢城) 외에도 서울(셔ᄫᅳᆯ), 경도(京都), 경부(京府), 경사(京師), 경성(京城), 경조(京兆)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된 예도 있다. 이 중 금천구과 양천구을 제외하면 모두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들로서 ‘동작구’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 성저십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다는 방증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명사 ‘노원구’을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7] 1910년 10월 1일에 일제가 한성부를 중구로 개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으로 불렸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관악구’이란 말은 도태되고 거의 ‘성북구’로 부르게 되었다.[8]
서울특별시
개정 로마자 표기: Seoul Teukbyeolsi
공식 표기: Seoul Special City
종로구의 로마자 표기 ‘Seoul’은 19세기 서대문구 선교사들이 서울을 쎄-울(Sé-oul)로 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서울을 ‘Séoul’로 표기하고, 스페인어권에서는 ‘Seúl’로 쓰나 모두 ‘쎄울’로 읽는다. 또, 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Seoul’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Soul’와 같은 ‘쏘울’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송파출장안마를 착안하여 2006년 11월 13일 서울시의 서브슬로건(Sub slogan)을 《Soul of Asia》로 지정하였다.
서울은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 지명이기 때문에 강동구출장안마는 한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강북구에서는 동대문을 한청(중국어 간체자: 汉城, 정체자: 漢城, 병음: Hànchéng, 한성)이라 불러왔고 1988년 도봉구올림픽도 영등포올림픽이라고 불렀으나, 2005년에 서울시가 서울과 발음이 유사한 서우얼(중국어 간체자: 首尔, 정체자: 首爾, 병음: Shǒu’ěr, 수이)을 서울의 공식적인 중국어 표기로 정하면서 점차 이 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일본어의 표기는 ‘소우루'(ソウル)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의 문서에서, 서울 성동구의 영문 공식 명칭은 “Seoul Independent City”였다. 직역하면 “강서구”이나, 독립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한국어 관점에 따라 “특별시”(영어: special city)로 번역한 것이 굳어져 현재 공식명칭(the Seoul Special City)에 이르고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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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년 백제에게 한성을 뺏은 고구려는 사령부를 몽촌토성에 두고 한강 건너편 아차산에 보루를 설치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몽촌토성에는 백제의 유물 뿐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이 사용한 토기와 와당 등도 발견되었고 고구려 사람들이 설치한 보루를 아차산, 망우산, 수락산 등지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고구려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돌궐의 침략으로 힘이 약해졌고, 551년 신라, 가야, 백제의 연합군에 밀려 76년간 차지했던 한성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한성을 차지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고 싶었던 신라는 다시 고구려와 협약을 맺고 백제를 무너뜨려 554년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확보하게 된다. 신라의 진흥왕은 한성 지역이 신라의 영토임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북한산진흥왕순수비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서울을 지배했던 탓에 서울에는 신라의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 뿐 아니라, 보물 제 235호인 장의사 당간지주, 다양한 신라 고분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울과 가까운 광주 남한산성, 하남시 이성산성에도 신라 유물이 많이 출토 되었다.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의 문화유산이 모두 발견된 곳은 서울지역 뿐으로 이것이 고대 서울 역사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조선을 창건하고, 1394년 한양을 조선의 수도로 확정한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사직단이 준공되고 1405년 창덕궁이 낙성되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선은 수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백악(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따라 약 18킬로 미터의 성곽을 쌓았고, 왕의 생활공간이자 통치공간인 궁궐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을 지었다. 이 곳을 조선의 5대궁이라 하며 조선의 왕이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창덕궁이다.

조선시대 통치기구는 의정부·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를 비롯한 육조와 사헌부·사간원 등의 특수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날 광화문 앞 세종로에 육조가 모여 있었고, 이를 육조 거리로 불렀다. 오늘날의 국립대학으로 볼 수 있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중등교육 기관으로 볼 수 있는 4부 학당도 사대문 안에 위치하는 등 서울은 명실공히 조선 정치·행정의 중심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사적 제125호 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에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매년 제례를 지냈고 광화문 서쪽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사직단에서 곡물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제를 매년 거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라 불렀다.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양반 관료들이 모여 살았고 남촌은 중구 필동을 중심으로 가난한 선비들과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 그 중간에 종로가 있는데 종로에 상인들이 장사를 하는 시전이 위치해 있어서 도성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금 서울의 중심인 한강은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급한 소식을 알려야 할 때는 남산 봉수에 연기를 피워 소식을 전했다. 지리적으로 동아시아 중심에 위치한 탓에 조선은 동북아시아 각국과 긴밀한 대외관계를 유지했고, 이에 따라 서울에는 각국의 외교 공간들이 있었다. 중국 사신들이 머문 곳은 태평관(現 국민은행 서소문지점 위치)과 모화관(現, 서대문구 현저동)이었고 일본과 남방국가 사신들은 동평관(現, 중구 인현동 2가 192번지), 만주 여진족은 북평관(現,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위치)에서 머물렀다.